상(商. BC1711~1066), 주(周. BC1066~256)시대부터 운남지역에서 차를 만들수 있는 소수민족은 백복족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백복족은 하니족, 라후족, 와족에게 차 가공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이 차는 보차(普茶)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 닝얼에 위치한 백복족이 하니족과 라후족, 와족에게 보이차 가공법을 가르쳤다는 고사가 있는 탑]
1800여년전 삼국시대 제갈공명은 남만정벌을 떠나는데, 남나산에 이르러 병사들의 눈에서 피고름이 나는 병이 돌자 차나무를 심고 달여마시게 한후 병을 고쳤다는 고사를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보이차 최초 고사로 이야기 합니다.
1253년 운남지역의 맹주 대리국을 멸망시킨 쿠빌라이칸의 원나라는 보일부 였던 지역명을 보이부로 변경하면서 운남일대의 차 집산지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17세기말 부터 명나라에 유행했던 보이차는 의방차산을 중심으로 제조되었으며 호급보이차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집산지인 보이부에 도착하여 세금을 내고 “普洱“도장을 받아 북경에 전해졌는데 덩어리 차를 처음 본 황제가 이것이 무슨차냐고 묻자, 세금도장을 본 신하가 “보이차”로 아뢰어 보이차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18세기 초 1723년 청나라 황실에 공납되면서 더욱 유명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이차를 마셨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모두 장수하였고, 조선임금 영조와 정조가 장수한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공납된 보이차는 3종류로
보이차고, 인두공차, 칠자병차의 형태 였습니다.
[ 자금성에 보관중이었던 칠자병차 ] 2008 촬영
[ 자금성 고궁박물관 소장 칠자병차 ]
[ 자금성 고궁박물관 소장, 보이차고 ]
[ 만수용단으로 불리우는 인두공, 자금성 고궁박물관 소장 ]
1838년 도광제는 중국 공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이차를 제조하는 이무 차순호에게 “서공천조”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려 보냈습니다. 이후 만싸차산의 이름은 이무정산으로 바뀌고 공납보이차의 중심지가 됩니다.
[ 서공천조 편액과 차순호 5대손 차지신 선생 ]
1912년 청나라의 멸망으로 공납은 중단되었으며
1938년 중화민국시대 중차패공사가 남경에 만들어지고, 차가 생산되는 모든성에 분공사를 두어 운남성 곤명에도 중차패운남성분공사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반도로 부터 쳐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차의 생산은 종전까지 미약했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다시 부활한 중차패 운남분공사는 차가 생산되지 않는 곤명차창에 분공사본부를 두고 차가 나는 모든 차창에 주문자 상표부착방식(OEM)으로 중차패를 생산하게 하였습니다. 즉, 운남의 모든 차창이 중차패를 생산하여 곤명차창에 납품하였습니다.
[ 가운데 중"中"자 8개가 원을 그리고 중앙에 차"茶“자가 쓰인 상표인 중차패, 사진은 녹인 ]
1960년대 자금성 유물조사 중 발견된 "운남보이차고, 인두공차, 칠자병차"는 광동성 차상인들을 자극하여 광운공병으로 불리우는 습창차류를 탄생시켰고 홍콩을 통해 대만과 싱가폴, 한국 등지에 전해집니다.
1973년 문화혁명말 광동성 습창차가 고가에 판매되는 것을 확인한 운남 맹해차창은 추병량, 오계영 외 2인을 광동성으로 보내 광동병차를 연구하였고
1974년 부터 조수악퇴식 인공발효차를 개발하여 "보이차 숙차"로 명명하고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숙차가 전통의 보이차로 오인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숙차는 황제가 음용했던 전통의 보이차가 아닙니다.
모든차는 같은 차나무에서 채엽하더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녹차도 될수 있고 홍차도 될수 있으며, 백차도 될수 있습니다.
전통의 보이차와 숙차는 그 제조방법부터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다른차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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